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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민족정신과 학교 지켜낸 민족대표 '김세환'
3·1운동 101주년 맞은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기사입력  2020/02/25 [08:51] 최종편집    양희상 기자

【경인데일리】3월은 시작을 알리는 달이다. 학교는 새로운 학생을 맞이하고,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 논밭을 갈아야 하는 시기다. 

 

 

‘빼앗긴 들녘에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일제강점기, 국권을 탈환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독립운동가에게도 3월은 비슷한 의미였을 것이다. 

 

1919년 3월1일 뿌려진 독립의 씨앗은 1945년 8월15일 열매를 맺기까지 수많은 의인들의 희생을 양분으로 자랐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수원과 이천, 충남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활동을 주도하며, 수원지역 교육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김세환(金世煥, 1889~1945)이 3·1운동 101주년을 맞는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라 수원을 기반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및 교육에 헌신한 그의 발자취를 조명해본다.

 

◇수원의 민족정신 지킨 수원 토박이 김세환

 

김세환은 1888년 11월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년기는 수원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변화의 시점이었다. 

 

1901년 성안 보시동에 감리교회(북수동 수원 종로교회)가 들어왔는데, 소년 김세환은 집에서 가까운 이 교회를 출입하며 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웠다.

 

이후 서울에 있는 관립 외국어학교로 진학했던 김세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접한 뒤 수원으로 돌아와 상업강습소(수원중·고교)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는 동시에 삼일여학교(매향중교)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직에 몸담았다.

 

뿐만 아니라 YMCA 간사였던 박희도를 통해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해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조직 책임자로 중추적 활동을 했다. 

 

지역 교회의 주요 인사를 만나 민족대표로 서명하도록 승낙을 받은 그는 서울로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져 독립선언서에 기명은 하지 못했다. 

 

결국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세환이 법정에서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명료하게 대답한 것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일화다.

 

1년여의 옥고를 치른 김세환은 1920년 10월 석방돼 수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교사로는 복직하지 못하고 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과 지역 유지로서의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하면서 수원지회장과 수원체육회장을 역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김세환은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및 종로교회를 근거로 활동하며 후학양성과 수원지역 교육계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을 맞고 한 달 남짓 시간이 흐른 9월16일 자택에서 운명했다.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3·1운동 101주년을 맞는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민족대표 48인으로 수원 독립운동 배후 활동

 

김세환은 민족사적 분수령이 된 1919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물론 수원지역의 독립운동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수원지역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김노적은 수원상업강습소 제2회 졸업생으로 김세환의 제자였고, 수원상업강습소 보조교사였던 박선태는 그의 후배였다.

 

당초 김세환과 김노적은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수원시내를 거쳐 화성학원까지 가는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면서 저녁 횃불시위로 대체됐다.

 

3월1일 저녁 방화수류정(용두각)에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를 포함해 수백명이 횃불을 들고 모였으며, 봉수대, 팔달산 화성장대 등 20여 곳에서 횃불이 올랐다. 

 

4월 중순까지 들불처럼 수원군 전역으로 퍼져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한 만세항쟁의 배후가 김세환이었던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수원의 청년들은 ‘구국민단’을 결성했고,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와 사회주의 청년들의 수원청년동맹 결성, 수원예술호연구락부 조직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했다. 

 

소작농들도 소작쟁의를 통해 식민지배에 저항했으며, 노동자들의 쟁의도 발생했다. 

 

학생들의 낙서와 격문사건, 조선총독 암살계획, 부민관 폭파사건 등 해방 직전까지 수원의 민초들은 조국 독립을 위한 항거를 계속했다.

 

◇삼일여학교와 화성학원 살린 교육계 거목

 

김세환의 삶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수원지역 교육계를 위한 노력이다. 

 

1908년 4월15일 수원 남수동에서 설립된 수원상업회의소는 수원 상업인들이 주도한 조직으로, 상업에 관한 지식과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상업강습소를 설치했다. 

 

야학으로 운영되던 상업강습소는 일제의 견제로 1916년 4월 폐쇄의 위기를 맞았으나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주학으로 전환해 화성학원(華城學院)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현재 수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는 1941년 일제당국과 교섭해 폐교됐던 화성학원을 수원상업학교로 다시 설립하는 일도 주도했다. 

 

수원상업강습소-화성학원-수원고등학교로 이어진 100년의 역사에서 김세환의 노력이 지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김세환은 현재 매향중학교의 전신인 삼일여학교에서도 큰 획을 그었다. 

 

1913년 학감으로 부임해 학교를 자주 비우는 밀러 교장의 빈자리를 대신한 그는 삼일여학교를 새롭게 단장하며 학교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넣음으로써 학생들과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려 했다. 

 

또 화홍문과 매향교 중간에 위치한 징검다리를 건너다니던 학생들이 장마철 불편을 겪자 학교 앞을 흐르는 수원천 위에 쇠줄을 걸고 화성 팔달문 문짝을 올려 쇠다리를 설치했다. 

 

이 쇠다리는 1920년 장마로 유실됐으나 1926년 봄 삼일여학교에서 1400원의 거금을 들여 6개월 만에 ‘삼일교(三一橋)’라는 다리로 재탄생했고, 현재까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오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그는 1939년 삼일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자 수원출신 갑부 최상희씨를 움직여 1만원의 희사를 받아 학교를 회생시키는데 조력했다.

 

◇수원박물관, ‘수원의 독립운동가’ 상설전시

 

국가보훈처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수원의 민족정신을 지킨 지도자 김세환을 선정한 것에 발맞춰 수원박물관은 수원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했다. 

 

3월부터 수원박물관 역사관의 상설전시 코너 ‘수원 근대의 인물’을 ‘수원의 독립운동가’ 코너로 새롭게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상설전시는 민족대표 48인이었던 김세환(독립장)을 비롯해 일제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자주독립을 외쳤던 수원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내용이 구성됐다.

 

▲구국민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순국한 소녀 이선경(애국장)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끈 의로운 기생 김향화(대통령표창) ▲조선총독 우가키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조안득(애국장) ▲구국의 일념으로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차인재(애족장)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가이자 독립운동가 임면수(애족장) ▲차별 없는 세상과 독립을 꿈꾸며 수원예술호연구락부 활동을 했던 홍종철(애족장) 등과 관련된 설명 및 유물을 전시한다.

 

수원박물관 관계자는 “수원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은 최초”라며 “일제의 심한 감시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은 어려웠지만 민족과 교육운동에 집중하며 후진을 양성한 김세환 선생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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